덧없는 것이 生命이라고 했다.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가다가 죽어가면 끝인 것이기에 살아 있는 동안 아둥바둥하며 살아가는 것이 불쌍하고 의미없는 짓거리라는 의미 일 것이다. 살아가고자 끊임없는 싸움을 하는 짓거리가 우습게 보일만도 하지만 빼앗기는 자의 삶은 더욱 悲慘하기에 싸움을 걸어오면 피하지 않고 최소의 무승부라도 얻어야 된다는 이상한 승부욕도 생긴다. 싸워야 한다는 것과 승리해야하는 강인함도 숙제처럼 삶을 억누른다. 삶은 끊임없는 싸움들로 이어진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타인과의 싸움 그리고 환경들과의 싸움들이다. 피배의 나락을 알기에 최소한의 무승부라도 얻고자 부단히도 노력하는 것인가 보다. ! 이 역시 부질없는 짓인데도 인간은 本能처럼 싸운다. 결국에는 싸우다가 인생이 마감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덧없는 삶이라고 하는 것인가 보다. 그래서 장자의 말처럼 " 한 세상 잘 놀다 간다."라는 말로 본인의 희망사항을 論했는지도 모르겠다.
살아가기 위해서 꼭 싸워야만 하는 것인가! 그냥 숙제를 혼자서 풀어가거나 함께 풀어가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이 역시 본인의 능력여하에 따라서 가능은 할 것이다. 혼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조력자도 얻을 수가 있다. 그러나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면 이용만 당하는 것이고 결국에는 패배가 확실한 싸움을 하게 된다. 최후의 발악 같은 행위라고들 한다. 그래서 최소한의 독립된 力을 가지고 있어야 다음을 대비할 수가 있다. 싸움은 상대가 나를 상대로 協議의 자세가 있을 때라야만 피할 수가 있다. 그러니 개인적인 힘이 필요하고 자립적인 삶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한참 유행하고 있는 各自圖生처럼 말이다. 내가 상대의 먹이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자기 보호력은 있어야 싸움 자세라도 취하면서 경계성을 발휘할 수가 있다. 싸우면 일방적인 패배자라면 쉽게 먹이감이 되는 세상에 살다보니 갖추어야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滿足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보다.! 세상에는 3~4만개의 일자리가 있다고 한다. 그것들을 잘해서 과시욕과 성취욕을 맛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는 것인데 그것을 잘 정리하지 못하면 끊임없는 도전으로 생을 보낼 수밖에 없다. 한가지 만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포기하고 집중하는 것이 보다 현명한 삶이라고 판단하여 다른 곳에 눈과 마음을 주지 않는 것뿐이다. 그런데 본성을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잘난 맛과 시류에 떠밀려서 문어발처럼 많은 곳에 간여를 한다. 그리고 실패와 좌절과 성취들을 얻는다. 이것이 습성이 되면 죽는 날까지도 새로운 것과 좋은 것을 취하고자 모든 것을 쓸어 넣는다. 마치 말의 눈 가람막을 쓴 것처럼 앞만 보고 죽을 똥 살똥 달리는 짐승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의식주와 문화만 채워져 있어도 여유롭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있는데 타인의 인정과 대접을 받고자 싸우며 챙취하며 살아가는 자들은 어쩌면 불쌍한 유전자를 가지며 태어난 자들일 것이다. 만족을 모르는 본성이 있어도 다듬과 억제하면 충분하게 관리가 되는데 본성을 다듬는 대신에 말의 눈가림막을 택한 어리석은 자들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숙제에서도 크고 작은 것들이 있다. 작은 것은 본인이 책임감을 가지고 노력하면 해결할 수가 있지만 큰 숙제는 사회나 국가가 해결해 주어야 한다. 아니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국민은 세금을 내고 그 세금이 개인의 큰 숙제들을 해결시키는 수단이 되도록 괜찮은 국가운영자를 선출을 한다. 그런데 잘못된 선출을 하게되면 개인의 숙제마저 못하는 꼴을 당하고자 만다. 국가의 억압과 관리부재로 재앙을 맞이 하는 것도 있다. 22년 10월 29일 이태원역 골목질 158명 압사 참사는 국가의 잘못된 행정으로 비롯된 참혹한 참사였다. 그리고 전쟁과 패망이라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꼴을 자연스럽게 맞이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