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가적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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陰害 造作 工作 및 예쁜 成形

인생도처유상수 2022. 5. 6. 14:44

산딸기 꽃이 피기전의 싱그러운 모습 22년 4월30일

인간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利得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무엇을 위한 이득이냐의 目的性도 있지만 習慣的인 행동도 작용되었다. 누구나가 "잘먹고 잘살자"라는 固定觀念과 權力慾 그리고 功名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의도적이든 습관적이든 개인의 富貴榮華를 위해 他人에게 害를 가해서까지 取得한다면 公正과 常識에 反하게 된다. 따라서 공공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응징이 필요하다. 서로 협력과 협조로 상호적인 부위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면 일방적인 착취가 되고 현격한 격차로 인한 삶의 질이 극단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을  착취해서 얻는 이득을 위해 음해와 조작과 공작질을 해온 것이 역사다. 소수의 권력자가 정보를 독점하고 권력을 독점하고 물건을 독점해서 부위영화를 누려왔던 것이 역사다. 노예가 존재하고 계급을 만들어 평등을 억제하며 소수의 이득을 취하는 행위를 정당화 시켰다. 소수의 高貴性이라는 名目으로 다수의 犧牲을 强要하는 악랄한 행위들이 一般的인 것처럼 洗腦시키며 착취했다. 그래서 글을 읽거나 선진문물을 獨占하며 다수의 인간을 짐승취급을 하며 소수의 부위영화를 확보했다. 그런데 情報와 學文이 開放되고 공유되면서 새로운 착취가 시작되었다. 정보를 취급하는 소수는 다수의 이득을 최소화 하고 본인들의 이득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음해와 조작과 공작질을 巧妙하게 실시했고 또다시 세뇌작업을 하였다. 

 

정보의 독점이 사라지니 새로운 搾取術이 등장했다. 基得權者들의 단결로 기존의 형성된 부위영화를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더욱 세련되고 교모하게 음해와 조작과 공작질을 해서 갈라치기를 했다. 그리고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면 戰爭을 하듯 죽기살기로 악질짓을 했다. 아직도 종놈근성이 있고 계급이 존재한다고 믿는 부류의 판단력 부족과 소수의 교묘한 공작질에 동조하는 다수가 있는 것이 작금의 狀況이다. 소수의 이득을 위한 공작질에 세뇌 당하는 부류는 상대의 작은 허물을 확대생산하는 나팔수가 되고 본인 스스로가 완장을 찬 기득권이라고 여기기까지 한다. 정신병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무대포다.소수의 기득권 維持는 삶의 目的인 것 같다. 공정하고 상식이 통하는 국가를 위해서는 이들처럼 전쟁을 해야한다. 상대를 해체시켜야 새로운 공정사회를 기약할 수가 있다. 보다 나은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는 반드시 기득권의 음해와 조작과 공작을 해체시켜야 한다.

 

2010년이후 부터 예쁜 성형이 유행처럼 번졌다. 소수에 국한된 현상이지만 정보를 취급하는 소수의 기득권자들이 여론을 비생산적인 쪽으로 몰아갔다. 성형은 의료가 우선인데 예쁘기 위한 수단이 전부인냥 湖塗했다. 젊음이 의도적으로 해체되고 반복적인 성형이 지속되었다. 나이들어 가는 얼굴이 젊어짐으로써 오는 쾌감에 취해서 걷잡을 수 없는 성형중독증에 빠진 일등국가가 되었다. 이 역시 비생산성인 성형을 통해 소수의 경제적인 이득을 위한 도구로 활용된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기득권들의 경제동물성이다. 오직 하나인 경제적인 권력을 통한 기득권 유지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는 현상에 다수가 착취를 당하고 있다. 

 

의료이외의 성형을 하는 대상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있다. 그래서 대면상태에서 지적질을 한다. 어디를 성형했는지 표시가 났다. 점점 모르게 화장질을 해서 명확하지는 않지만 오래 알고 지낸 대상은 아무리 화장술을 발휘해도 표시가 난다. 지적질을 하면 "안했다"고는 하지만 적개심은 생길 것이다. 예뻐지기 위해 성형을 하는 행위와 소수의 기득권자들의 음해와 조작과 공작질을 同一하게 보고 있기에 화를 내는 것이다. "누구한데 잘 보이려고 이 나이게 성형까지 했냐"가 나의 질책이다. 점점 인위적이고 가식적인 대상들과 멀어지고 있다. 지적질을 하는 습관이 고쳐지지 않으면 성형에 목숨 건 다수에게서 疎外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소수들과 어울리며 지내겠지! 그것이 정상적일 수가 있다. 활동량도 줄여야 하고 만남도 축소시켜야 하는 상황속에서 굳이 인위적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도 없다. 

 

세상이 다수의 삶을 위해 발전해 가기 위해서는 소수의 계급적인 행위들에 대해서 응징이 필요하다. 음해와 조작과 공작질을 하는 것에 대한 응징이 필요하다. 그런데 응징을 집행하는 조직들이 기득권자들이다. 따라서 새술은 새자루에 담아야 가능한 것이다. 새자루가 준비는 되어 있는데 술이 썩어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인 것이 슬프다. 새술은 삶의 주인의식과 독립성이 확보되어 생기는 것임을 .....